사건사고

골드러시, 미국의 흑역사 [사건사고]

Mr. I.II 2024. 7. 30. 23:00

때는 19세기 중반,

트러키 호수 위의 2,160m 높이의 고개, 1870년대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사금이 발견되면서
수많은 개척민들이 캘리포니아로 향했습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은 ‘골드러시’라고 불렸죠


과거에는 금이 발견되면 모두 왕이나 지배층의 몫이었지만,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는
평범한 사람들도 금을 찾아내기만 하면
개인이 소유할 수 있었답니다!



금을 발견하면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푼 이들은 모두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습니다.


1846년 4월 18일


1846년 봄,
약 90명의 이민자들 또한 골드러시의 꿈을 안고
스프링필드를 떠나 서쪽 캘리포니아로 향했고,
이들을 도너파티(Donner party)라고 부릅니다

제임스와 마가렛 리드


이 그룹의 창시자는 일리노이주의 사업가인
제임스 프레이저 리드였으며,
그는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땅에서
더 큰 재산을 쌓기를 원했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친구들이 차례로 그의 손을 잡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네는 동안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침내 우리 모두 마차에 올라타
마부들이 채찍을 휘둘렀을 때
소들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고,
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 제임스 리드의 딸 버지니아 리드



당시 개척자들 대부분은 아이다호를 지나
네바다를 가로지르는 캘리포니아 트레일을 따라갔는데요,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 트레일과 헤이스팅스 컷오프 경로


그러나 1846년, 랜즈포드 헤이스팅스가 쓴 여행 안내서에서
와사치 산맥과 솔트레이크 사막을 가로지르는,
일명 ‘헤이스팅스 컷오프(Hastings Cutoff)’라는 새로운 지름길을 광고했습니다.

이 새로운 경로는 개척자들이 보다 평탄한 지형에서
총거리의 약 550~650km를 줄일 수 있다고 홍보했죠.


그러나 도너 일행이 간과했던 것은
헤이스팅스를 포함해 그 누구도
이 지름길을 횡단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이들은 산악인 제임스 클리먼의 경고가 담긴 전보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조지 도너가 이끄는 일행은
캘리포니아로 가는 기존 경로가 아닌
검증되지 않은 지름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최악의 결과를 낳았죠


Donner Party가 이동한 경로 지도. 주황색으로 표시된 헤이스팅스 컷오프, 이로 인해 이동 거리가 약 240km추가되었다.


이주민들은 직접 나무를 베어서 길을 개척해야 했고,

8월 30일
솔트레이크 사막을 횡단하며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햇빛으로 인해 소금 껍질 아래의 습기가
표면으로 올라와 끈적끈적한 덩어리로 변했고,
마차의 바퀴가 가라앉아 꼼짝 못 하게 되어
진행 속도가 크게 느려졌습니다.

사막에서 보낸 셋째 날, 물이 거의 바닥났고
갈증을 이기지 못한 소 몇 마리가 도망치기도 했어요

5일 후인 9월 4일
그들이 마침내 사막 끝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마차 3대와 32마리의 소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헤이스팅스의 ‘지름길’은 시간을 절약하기는커녕,
그들의 여정이 한 달이나 늦어지는 비극을 초래했죠


도너파티가 지금까지 견뎌낸 시련은
이내 이기심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쇠약해진 동물들의 짐을 덜기 위해 모두가 직접 걸어야 하는 상황 속,
벨기에 출신 하드쿠프라는 노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며칠 동안 험한 지형을 걸은 탓에 그의 발은
심하게 부어올라 갈라졌고,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개울가에 앉아 있었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두고 떠나버렸습니다.

뒤늦게 그를 찾아달라고 간청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이를 거부했고,
거의 70세인 노인에게
더 이상 우리의 자원을 낭비하지 않겠다
언했습니다.



그들은 1846년 11월 초,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경사지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의 여정은 겨우 160km 정도를 남겨두고 있었으나…
예상보다 이른 폭설이 시에라 산맥을 뒤덮었습니다.

윌리엄 길버트 골 [정상으로 가는 길] (1891)

단 하루 전만 해도 통행이 가능했던 산길은
곧 눈으로 얼어붙어버렸고,

도너 파티는 인근 트러키 호수로 후퇴하여
허름한 텐트와 오두막에서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트러키 호수에 있는 60명 중 19명은 성인 남성,
12명은 여성, 29명은 어린이였으며,
그중 6명은 유아 또는 그 이하의 어린이였다고 합니다.



트러키 호수에서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사방에 소들의 얼어붙은 사체가 쌓여있었고,

이미 스탠턴이 가져온 보급품에서
남은 음식은 거의 없었으므로
소가죽 조각을 삶아 접착제 같은 젤리를 만들어먹었습니다.

소와 말 뼈를 계속 끓여 수프를 만들기도 했고
어린아이들은 불 앞에 앉아
소가죽을 조금씩 뜯어 불에 구워 먹었습니다.


1846년 12월 16일
눈에 갇힌 지 한 달이 넘은 후,
도너 파티 중 15명이 산에서 걸어 나와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남자 5명, 여자 9명, 아이 1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스노슈즈를 신고 출발하였으나
여섯째 날, 그들의 식량이 바닥났고
먼저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구워 먹으며 버텼습니다.

1847년 1월 19일에서야
목적지인 서터 요새에 도착한 이들은
이미 7명으로 줄어있었습니다.
나머지 8명의 사망자 중 7명은 식인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조를 위해 떠난 15명 중에는
살바도르(Salvador)와 루이스(Luis)라는
인디언 두 명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식인 행위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자신들의 시신까지 먹힐까 두려워져 무리를 이탈했습니다

며칠 후, 결국 그들은
윌리엄 포스터라는 남자에게 잡혀 살해당했고,
그 후 도살되어 먹혔습니다.


역사가들은 나중에 그들의 절박한 하이킹을
"절박한 희망(The Forlorn Hope)"이라고 불렀습니다.


Pictorial Press Ltd/Alamy Photo



한편,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트러키 호수에 남겨진 이들은
삶은 가죽과 나무껍질 조각으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허기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고
남겨진 사람들은 구조를 기다리며
얼어붙은 동료들의 시체를 먹어야 했습니다.

도너 파티 생존자의 약 절반이 결국 인육을 먹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첫 번째 구조대

1847년 2월, 첫 번째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핼쑥해진 머피 부인이 나타나 그들을 응시하며
“당신들은 캘리포니아에서 온 사람인가요,
아니면 천국에서 온 사람인가요?"
라고 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 번에 모두를 구조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우선적으로 23명 만을 추려 구조한 뒤
남겨진 이들을 위한 보급품을 두고 떠납니다,


구조되지 못하고 남겨진 몇몇은
초조하고 절망적인 마음에
산에서 걸어 나오려다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패트릭 브린의 일기 28페이지, 1847년 2월 말에 그가 관찰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어제 머피 부인이 밀트를 잡아먹을 생각이었다고 말했지만 아직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끔찍하다.“ 라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3월 1일
두 번째 구호대가 호수에 도착해 총 17명을 구조시킨 뒤

3월 14일
세 번째 구조대가 나머지 다섯 명의 사람들을 구조했습니다.


마지막 구조대

4월 17일, 마지막 구조대가 캠프에 도착했을 때
식인으로 훼손된 유해 가운데

Lewis Keseberg (1814 – 1895)


오직 루이스 케세버그만이 유일한 생존자였습니다.

당시 캠프 냄비 안에 인육이 담겨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구조대원이었던 윌리엄 팰런 또한 그가
도너의 살이 "지금까지 맛본 것 중 가장 맛있었다"라고
말했다 주장했지만
후에 루이스 본인은 이 발언을 부인했습니다.

뭐가 진실일까요?


추후 루이스 케세버그는 재판을 받았지만
법원에서 식인에 대한 죄를 묻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도너 파티에 참여한 41명이 사망하고
46명이 살아남았습니다.

5명은 호수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고,
35명은 산 캠프에서 사망하거나 산을 건너려고 하다
사망했으며,
1명은 계곡에 도착한 직후 사망했다고 합니다

당연하게도 살아남은 생존자들 중 다수는
동상으로 팔다리를 잃었습니다.

1866년, 도너 파티가 베어낸 호수의 그루터기


위 사진 속 그루터기의 높이는
당시 눈의 깊이를 가늠케 합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폭설이었던 것 같네요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 있는 서터 요새, 1847년


사건 이후,
도너 파티의 비극은 미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랜스포드 헤이스팅스를 비극의 원인으로 지목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제임스 리드가 검증되지 않은 경로에 대한
클리먼의 경고를 무시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868년, 도너 고개에서 바라본 트러키 호수의 풍경


어쨌거나 이 사건 직후
캘리포니아로의 이민은 급격히 감소했고,
그들의 참혹한 여정은 서부 개척 시대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골드러시로 인한 미국의 흑역사는 비단
도너파티뿐만이 아닙니다.

개척자들이 금 매장지를 차지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했던 역사가 있죠.

영화 [샤이닝] (1980)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은 다 아시겠죠?
스탠리 큐브릭의 명작 ‘샤이닝’에도
도너파티에 관한 대사가 나옵니다!

아마 주인공 잭의 광기 어린 살인에 대한 복선이었겠죠


영화 [샤이닝(1980)] 도너파티 언급

영화 속 오버룩 호텔

작중 오버룩 호텔이
인디언 묘지 위에 지어졌다는 대사가 있습니다.
일부 해석가들은 영화 속 잔인한 사건들,
특히 호텔의 역사 등이 미국 원주민에 대한 폭력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보기도 해요

호텔이 1909년 완공됐다는 설정이니
당연히 골드러시 당시 원주민 학살 또한 포함이겠죠

1866년, 트러키 호수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사건의 이름을 딴 도너 호수는
오늘날 캘리포니아 주 트러키의
가장 인기 있는 산악 명소이며
도너 캠프는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놀러 가보세요
수상한 뼈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상 ’골드러시의 흑역사, 도너파티‘였습니다.
감사합니다